阅读:中韩第一次正式会谈(解密历史)

出处:Money Today

原题:한국과 중국의 첫 번째 공식회담

作者:前清华大学美术学院教授 차홍규(韩)

提示:下面的文章从韩国人的角度写了1983年5月发生的卓长仁劫机案(劫持沈阳飞往上海的飞机后飞往韩国,降落在韩国春川驻韩美军基地并要求去台湾)。历史有时很有意思,一次偶然的劫机竟然成为了中韩两国建交的契机。大家如果看不懂下面的内容,可以百度卓长仁,大致的内容是一样的。

但百度不会告诉你如下事实:

1、发生劫机案的瞬间韩国政府和媒体就认为这是接触中国的绝佳机会,韩国媒体甚至露骨地说“飞来的是只凤凰”。

2、当时中韩没有建交,互不承认对方。考虑到朝鲜的感受,中方希望尽量少接触韩方,希望通过间接沟通解决问题。但此时主动权在韩国手里,最终中方不得不派出中国民航总局局长沈图在内的33名工作人员飞赴首尔处理劫机案。

中韩交涉的核心是对劫机犯的处理和中韩双方签字时的国家名称。中方希望引渡劫机犯到中国,而且不希望使用两国的名称,但最终双方还是在包含9项内容的外交文件上签名,签上的是大韩民国和中华人民共和国。(这算间接承认对方了吧?)

3、处理结果:飞机、乘务员、乘客、伤员返回中国;劫机犯则根据韩国法律判决(6名劫机犯在韩国待1年后去了台湾),中韩双方同意今后有类似事件发生时双方紧密合作。从下一年开始允许两国之间的亲戚来往。

4、韩国政府把中国乘客和机组人员安排到当时韩国最顶级的酒店“华克山庄”,并安排乘客游览汝矣岛和爱宝乐园,回中国的时候还把三星彩电作为礼物送给中国人。韩国政府可谓煞费苦心,想利用这次劫机案改善中韩关系。

5、最后一段讲了中国政府对韩方的心思也明了,并作出了一些安排,具体不便翻译。

卓长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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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첫 번째 공식회담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인 대낮에 수도 서울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실제상황입니다. 주민들은 비행기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당시 서울 시민이었던 저는 영문을 몰라 당황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사건은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中国民用航空总局)소속 여객기 한 대가 선양 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치아오국제공항(上海,虹桥国际机场)으로 가던 중이었다. 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승무원이 거부하자, 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2명의 승무원에 중상을 입히고 기수를 우리에게로 돌렸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건국 후 처음이었다.

비행기는 서울을 피하여 춘천에 소재한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 기지에 불시착하였다. 그들은 중화민국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여, 그 당시 안기부 박세직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하고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납치범들은 무장을 해제하였다. 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박희태 관리국장(후에 국회의장)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일부 신문에서는 ‘봉황이 날아 들어왔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는 등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북한을 의식하여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을 원했으나,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쥔 우리 정부의 고자세에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우리의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후에 외교통산부 장관 역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측과 직접 협상을 벌여야 했다.

후일담으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교섭의 핵심은 납치범의 처리와 서명당사국의 명칭이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납치범들은 범죄인들로 간주하고 인도를 요구 하였고, 양국의 국가 명칭도 사용치 않으려 하였으나, 결국 9개 항에 걸친 정식 외교 각서에 서명을 하고, 명칭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항공기는 안전점검 후, 승무원, 탐승객은 부상자 치료 후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으나 납치범은 우리 뜻대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해부터 친인척의 방문 교류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당시 최고급인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에버랜드)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삼성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 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형식적인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台湾)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였으나, 납치범 중 일부는 망명이후 중화민국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값을 목적으로 아동을 유괴했다가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는 불상사도 있었다.

그 이후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중국정부는 한-중 수교를 예견하고 친인척 방문을 기회로 중국의 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소속은 물론 조선족 공무원들을 부부동반으로 동원하여 한국의 각지에 보냈다. 이들은 특정임무를 받고 임의로 한국의 식당이나 공장 등에 취직하였고, 한국에서 버는 돈으로 생활도 하고 저축도 하고 정보도 얻었고, 귀국 후에는 정보의 가치에 따라 밀렸던 봉급은 물론 보다 나은 신분적 대우와 포상금을 따로 받았다. (위 사항은 우리 신문지상에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확인한 것이다.)

此一时彼一时也


现在中韩两国关系如何从下图中就能看出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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