韩国政府成立过程(有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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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과정

일제의 패망에 따른 조국의 광복은 환희와 더불어 안타깝게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통일된 독립운동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통치권은 공백상태가 예상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송진우(宋鎭禹)와 여운형(呂運亨) 등의 조선의 지도자들과 치안권 또는 행정권의 이양을 협의한 끝에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포함한 행정권의 일부를 넘겼다. 여운형은 치안유지의 차원을 넘어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 이틀 뒤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약칭 建準)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당초 좌우익과 중간노선의 정파 모두를 포함하려 하였던 건준은 안재홍(安在鴻) 중심의 우파들이 탈퇴하고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뒤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선포한 이른바 ‘인공(人共)’에는 사전승낙도 없이 우익민족지도자들조차 망라하고 있어 국민들을 현혹시켰으며, 이는 미군이 진주하여 10월 10일 불법단체로 선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시기에 건준 및 조선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보수 계열의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공산주의자의 활동에 비해서는 미약하였다.

뒤이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귀국함에 있어 미군정 당국은 ‘인공’을 부인하는 논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부인함으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한반도에는 정치세력의 분립현상이 나타났다.

그 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 3개 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결정된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 가운데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은 찬탁과 반탁으로 양극화되었다.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싸고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비상국민회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좌파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논의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12일까지, 그리고 1947년 5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열리는 동안 소련점령군 당국은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산업시설의 국유화, 지방정권기관 조직 등 단독공산정권 수립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미군정 당국도 1946년 2월 군정청 자문기관으로 구성되었던 ‘남조선민주의원’을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개편하면서 북한지역의 동향에 대응하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승만의 단정(單政) 추진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조차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거부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탁통치 대신에 최단시일 내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47년 9월 17일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연합총회에 의제로 상정하였으며, 국제연합총회는 11월 14일 국제연합 감시하의 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이 소련 당국에 의하여 거절됨으로써 총선거는 선거감시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는 유권자 총수의 75%가 투표에 참가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제헌의회를 출범시켰다. 북한공산 당국 역시 1947년 11월 헌법제정에 착수하였으며, 1948년 4월 초안을 채택하고 그 해 9월 8일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한 뒤 이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제연합총회가 결의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국회 구성과 이 국회로 하여금 독립된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결정은 실현되지 못하고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선에 즈음해서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 일부 지도자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호응하여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图:1948年金九越过三八线赴平壤参加南北政治协商会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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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简析(金龙一)

1945年日本投降,但日本的投降带来了朝鲜半岛在政治、经济、社会层面的混乱。原因是在没有统一的独立运动组织的状况下,朝鲜半岛的出现了权利真空。

朝鲜总督府(殖民地政府)和송진우(宋鎭禹)와 여운형(呂運亨)等当时朝鲜的领导人协商了治安、行政的权利过度。最终把包括治安在内的行政权的一部分过度给了呂運亨,但呂運亨为了尽快独立,筹建了朝鮮建國準備委員會。

但该组织计划包含左右翼和中间派,最终右派出走,朴憲永领导的共产主义者主导并最终变成朝鲜人民共和国。

共产主义者宣布了所谓的“人共”,但该组织被后来的美军宣判为非法组织。

海外的独立运动领导人姗姗来迟,而且在美军否定“人共”的时候连大韩民国临时政府也被否定,所以临时政府的要员也只能以个人身份回国。朝鲜半岛由此出现了政治上的分立现象。

1945年12月在莫斯科举办的英美苏三国外长会议上签订了《朝鲜议定书》,但围绕该议定书里的(朝鲜)托管统治案,各方政治势力要么反对,要么赞成,最终变成两极化。

朝鲜国内的政治势力也对于莫斯科决议分为赞成和反对两派。赞成的做派筹建了民主主义民族阵线。在这样的局面下,在国内筹建了美苏共同委员会讨论朝鲜半岛的统一问题。

美苏共同委员会在1946年和1947年开了两次长达数个月的会议,在这一过程中,占领北韩的苏联占领军在北韩实施了土地改革,工业国有化,并独自建立了独立的共产主义政权。

看到这一情况的美军则在南韩组建南朝鲜过渡普选委员会,以应对北韩的动向。

美军虽然推进了南韩的左右翼合作但最终失败。美苏共同委员会也没有取得任何成果,最终美军决定在最短时间内成立独立政府。

同时,美国政府在1947年9月17日向国际联盟(联合国的前身)提交了韩国独立问题,国际联盟则决定监督朝鲜半岛的总选举。

但为了监督选举奔赴北韩的国际联盟韩国临时委员会则被苏联当局拒之门外,因此,选举仅在南韩地区举行。

1948年5月10日南韩选出了198名国会议员,并组成了制宪议会。北韩的共产党政府也在1947年11月开始着手制定宪法,并在1948年4月制定出宪法草案,并在同年9月8日组建“最高委员会”后确定了宪法。

由此,国际联盟通过人口比例筹建国会并通过国会成立统一政府的计划没有实现,朝鲜半岛走向了政治上的分离。

选举前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等部分领导人反对南韩单独成立政府并开展了成立统一政府的运动。对此,北韩的共产主义者也作出响应,并在1948年4月在平壤举办了南北政治协商会议,但没有取得任何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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